비가 내렸던 지난 28일 서울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국제전자센터로 가는 길 옆에 있는 철문을 열고 약 30초를 걷자, 자줏빛 발광다이오드(LED) 조명 아래에서 녹색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과거 지하철 승객들이 다니던 계단을 이제 묘판(苗板)을 든 ‘도시 농부’들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스마트팜 토털솔루션 업체 넥스트온은 약 4개월의 시범 운영을 마무리하고 이달부터 남부터미널역 스마트팜(식물공장)을 본격 가동하고 있다. 식물공장은 온도와 빛, 습도, 양분 등을 조절해 기상 조건과 관계없이 농작물을 길러낼 수 있는 시설이다.

28일 서울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내 넥스트온의 식물공장에서 샐러드용 채소가 자라고 있다. /권오은 기자
28일 서울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 내 넥스트온의 식물공장에서 샐러드용 채소가 자라고 있다. /권오은 기자
28일 서울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의 옛 지하상가 벽에 '지하철' '터미널'이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위로 넥스트온의 식물공장이 보인다. /권오은 기자
28일 서울지하철 3호선 남부터미널역의 옛 지하상가 벽에 '지하철' '터미널'이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위로 넥스트온의 식물공장이 보인다. /권오은 기자

◇ 10년 넘게 방치됐던 지하상가… 식물공장으로 재탄생

남부터미널역 식물공장은 원래 1987년 진로종합유통이 지하상가로 조성했던 곳이다. 2008년 기부채납 방식으로 서울교통공사에 반납됐지만, 입찰 공고가 번번이 유찰돼 10년 넘게 빈 공간으로 남았다. 농업진흥청과 서울교통공사가 2019년 넥스트온 등이 참여한 컨소시엄을 ‘스마트팜 플랫폼’ 운영사업자로 선정하면서 국내 최대 규모의 지하철역 식물공장으로 재탄생했다.

전체 면적이 5629㎡인 지하 공간에 현재 약 1400㎡(약 420평) 크기의 식물공장이 운영되고 있다. 5단으로 쌓인 재배단에서 크리스피아노와 이자벨, 이자트릭스 등 샐러드용 채소가 크고 있었다. 묘를 옮겨 심은 뒤 3~4주면 다 자란다. 연간 최대 100톤 규모를 수확할 수 있다. 같은 양을 노지에서 기르려면 10배 이상의 면적이 필요하다.

지하 공간이지만 ’밤낮’이 있다. LED 조명이 켜져 있을 때가 낮, 꺼지면 밤이다. 낮에는 20도, 밤에는 15도 안팎의 온도가 유지된다. 이규하 넥스트온 바이오소재팀장은 “채소들의 맛을 위해서 일교차를 만들어준다”이라며 “낮에는 식물이 빨리 자라고, 밤에는 조직이 단단해지는 특징을 살린 것”이라고 말했다.

넥스트온은 장기적으로 남은 공간을 ‘복합 공간’으로 만들 계획이다. 방금 식물공장에서 재배한 채소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나 도시 한가운데서 사시사철 수확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는 체험 공간이 조성될 전망이다.

/ 권오은 기자

◇ 자체 LED 기술로 전력비용 70% 절감

넥스트온이 버려졌던 공간을 식물공장으로 바꿔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넥스트온은 2019년부터 충북 옥천터널에서 딸기와 채소 등을 수확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생긴 옥천터널은 새 터널이 뚫린 2002년 이후 폐터널로 방치됐던 곳이다. 넥스트온이 방치됐던 터널과 지하공간을 식물공장으로 활용하는 이유는 ‘경제성’이다. 많은 식물공장은 외벽을 세워야 하는 만큼 초기 투자비용이 큰데 터널과 지하공간을 활용하면 이를 대폭 줄일 수 있다. 땅 위에 세우는 것보다 일정 온도를 유지하기도 유리하다.

넥스트온의 자체 기술도 비용 절감에 기여하고 있다. 일반 LED 조명의 온도가 67도까지 오르는 것과 달리 넥스트온의 LED 조명은 35도를 넘지 않는다. 일반 LED 조명을 사용하면 겨울에도 에어컨을 틀어야 해서 전기료가 많이 들지만, 넥스트온 자체 LED로 이 비용을 약 70% 줄였다.

넥스트온은 또 재배단 파이프라인을 흐르는 양액도 모두 재활용한다. 식물공장 밖으로 버리는 오폐수가 전혀 없다. 식물공장의 환경을 일정하게 제어하는 정보통신기술(ICT) 솔루션도 넥스트온의 자체 기술이다. 넥스트온은 이같은 기술력과 사업성을 인정받아, 2019년에 55억원의 투자를 유치했고, 지난해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으로부터 30억원 규모의 창업기업지원자금을 받기도 했다. 올해도 추가 투자 유치가 마무리 단계에 있다.

최재빈 넥스트온 대표. /넥스트온 제공
최재빈 넥스트온 대표. /넥스트온 제공

◇ 광반도체 전문가 최재빈 넥스트온 대표 “IT 적용하면 혁신적인 식물공장 가능”

최재빈 넥스트온 대표는 서울반도체(10,040원 ▲ 30 0.3%)에 대리로 입사해 사장으로 퇴임한 광반도체 전문가다. 그는 서울반도체가 매출 ‘1조원 클럽’에 가입한 2013년말 목표를 다 이뤘다며 회사를 나왔다. 이듬해 포스코LED(현 글로우원)를 인수하고, 누적적자 400억원이 넘던 회사를 1년만에 순이익을 내는 회사로 바꿨다.

최 대표는 2017년 1월 넥스트온을 설립했다. 최 대표는 “전세계적으로 인구는 계속 늘어나는데 기존의 재배 환경은 나빠지고 있어 식물공장을 대안으로 판단했다”며 “특히 IT 기술을 적용하면 더 혁신적인 식물공장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했다.

넥스트온은 강원도 태백에도 식물공장을 세운다. 지역 일자리 창출 등 상생형 모델을 구축하기로 했다. 폐광산에서 나오는 차가운 공기를 활용해 연간 최대 600톤의 딸기를 길러낼 계획이다. 일부는 딸기 수요가 큰 동남아 시장에 팔 계획이다. 더불어 넥스트온은 식물공장 설비기술도 수출을 추진하고 있다.

무엇보다 식물공장에서 바이오 소재 작물을 양산하는 게 가장 큰 목표다. 제약용 성분을 식물에서 추출하면, 합성 방식으로 만들 때보다 안전하고 흡수율이 좋다. 넥스트온은 식물공장에서 바이오 소재 작물을 길러 성분 함량과 순도를 높여갈 계획이다. 최 대표는 “식물공장에서 안정적으로 바이오 소재 작물의 데이터를 축적해나갈 계획”이라며 “지표 성분이 균일하게 나오면 의약품에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